황정근의 히스토리

황정근의 히스토리

내가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린 날은 1961년 2월 3일(음력 1960년 12월 18일) 밤이다. 누구나 민주주의를 노래하느라 참으로 어수선했던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시절이다. 제17대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장향숙 전 국회의원이 같은 날 태어났다.

그 날 대한민국 국회(민의원)는 ‘대일복교(對日復交) 4원칙’을 결의하였다.

“첫째, 대일국교는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하고, 둘째, 평화선(平和線)을 수호해야 하며, 셋째, 정식국교는 일본의 점령에 의한 손해와 고통이 청산된 뒤에 하고, 넷째, 한일경제협력은 정식국교 후 국내 산업이 침식(侵蝕)되지 않는 한도에서 한다.”

그로부터 불과 100여일 후에 박정희 소장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 국회 결의는 그 후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줄을 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서두른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결국 무시당하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18년 후 내가 서울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대학입시에서 쓴 맛을 보고 종로학원 종합반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 하던 때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 당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어린 나에게 유일한 국가원수는 박정희뿐이다.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른 채 박정희의 군가와 새마을노래를 듣고 국민교육헌장(1968)과 유신헌법(1972)을 외우며 그의 그늘에서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웠다면, 나는 박정희 전기를 읽고 롤 모델로 생각하며 성장하였다. 다만 나는 무(武)의 길이 아니라 문(文)의 길을 택했다. 1961년에 태어난 나에게 박정희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운명의 인물인 것이다. 그렇게 자라서인지 내 외모가 퍽이나 닮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호불호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 누가 아무리 독재자라고 우겨도 박정희는 박정희다.”
 

1961년은 MBC문화방송이 개국한 해이니, MBC와 내 나이가 같다. 1961년에는 무려 932,000명이 태어났다. 베이비부머(1955-1963)는 총 725만명이나 되는데 그 중 최고치다. 1956년생이 629,000명, 1960년생이 923,000명이다. 2부제 수업을 한 세대이다.

그리고 나의 지난 50여년 성장사는 곧 대한민국 경제발전사와 정확하게 오버랩 된다. 우리나라 수출액만 보더라도 1964년 1억불, 1971년 10억불, 1977년 100억불, 1995년 1,000억불, 2011년 5,000억불(세계 7위)로 성장하였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는 섣달(12월) 18일이어서, 나는 쥐띠다. ‘설운 살(서러운 살)’이다. 태어난 시간도 자시(子時)여서 필시 부지런하게 일해야 먹고 살아갈 사주라고 한다. 어머니(박규옥·朴奎玉)는 나와 같은 쥐띠로서 25살에 경북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 494번지 초가집에서 할머니(안모열·安慕烈)의 도움을 받아 나를 낳았다. 위로 58년 개띠 누나(정모)가 있고 내 동생이 다섯으로 3남 4녀인데(정모, 정근, 정미, 창근, 정화, 정선, 호근), 어머님은 일곱 남매를 산부인과 한번 못 가보고 모두 집에서 낳아 기르셨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정근(貞根)이란 이름은 할아버지(황기흠·黃耆欽)가 지었는데, 나무 목(木) 변인 근(根)은 금수목화토(金水木火土) 순으로 돌아가는 집안 항렬자이고, 곧을 정(貞) 자는 이미 누나의 이름[정모·貞模]에 쓴 글자다. 점 복(卜)에 조개 패(貝)가 합쳐진 글자인데, 조개로 점을 친다는 뜻이다. 중국고대사에 나오는 정인(貞人)이 바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이다. 정(貞) 자는 정절(貞節)이란 어감 때문에 여성에게나 쓰는 글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이나 김정렬(金貞烈) 전 국무총리에서 보듯이 남자 이름에도 많이 쓰는 글자다. 족보에 나의 자(字)는 취장(就將), 동행 창근은 취문(就文) 막내 호근은 취신(就新)이다.
 

아버지(황순헌·黃淳憲)는 1932년생, 어머니(박규옥·朴奎玉)는 1936년생이다. 두 분은 평생을 고향집에서 살다가 2004년 예천양수발전소가 들어오면서 동네가 수용되자 실향민이 되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가 1935년 영주 풍기를 떠나 예천으로 이주한 지 69년 만에 2004년 12월 원래 고향인 영주시 풍기읍에 이사 가서 1년 간 사시다가 서울 중계동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사셨다. 경북도청이 새로 이전해오는 예천군 호명면으로 2014년 4월에 다시 귀향하여 지금은 호명면 오천리 면사무소 뒤의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 494 초가집이다. 마을이름은 송월리(松月里) 월감(月甘)이다. 이름 그대로 소나무에 달이 걸린 풍경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달이 달기까지 하니 참 잘 지은 동네이름이다. 월암감당(月岩甘堂), 마을 뒷산에 월암(月岩)이 있고 동네에 감당(甘堂)이 있어 월감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유래도 전해진다. 순흥안씨(할머니가 순흥안씨다) 형제가 난을 피해 굶주림과 허기에 지쳐 목을 축이고 꿈에 둥근달이 중천에 떠 있는데 산신령을 만나 이곳에 보금자리를 잡고 감나무도 심었는데 그 맛이 달아 이곳을 감나무골 또는 월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천읍에서 단양 쪽으로 30여리 떨어져 있고 하리면 소재지에서 상리면 쪽으로 5리 정도 더 올라간 곳에 있다. 마을을 지나 소백산 저수령을 넘으면 단양이다. ‘송월리(松月里)’라는 동명은 물 건너 소내실마을[松川]과 월감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월감마을에는 많을 때는 약 50여호가 살았는데, 우리 집은 동네 맨 뒷집이어서 뒷산에서는 가장 가까운 집이다. 그 집은 원래 할머니의 친정집이었다.

눈을 떠 앞을 보면 산과 하늘밖에 안 보이는 첩첩산중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지비 천청(地卑 天淸)한 곳이다. 집집마다 식구가 많아 내 동년배가 10명이 넘었다. 2004년 예천양수발전소 부지로 수용되면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월감 동네와 고향집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태어난 집은 6·26전쟁 때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된 후 새로 지은 ㄱ자형 흙벽돌 초가집이었다. 해마다 짚으로 지붕을 이을 때 낡은 이엉을 걷어내면 거기에 굼뱅이가 수북했다. 비교적 넓은 안방, 사랑방, 셋방이 있는 본채에, 소 외양간과 뒤주(창고)와 디딜방아가 있는 별채가 붙어 있고, 대문 바깥마당 건너에는 재래식 화장실과 재를 쌓아두는 헛간과 돼지우리가 있는 헛간이 있었다. 대문 안마당 가운데에는 펌프식 우물이 하나 있었다. 집의 뒤 뜰 안에는 닭장이 있고 조그만 텃밭에는 고추와 가지와 오이가 달려 있었으며, 커다란 뽕나무가 한 그루 있어 해마다 내가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의 오디가 열렸다. 대문채 지붕 위에는 박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려 있었고, 집을 에워싼 돌담은 호박넝쿨이 뒤덮고 있었다. 남자 손님들은 대문이 아니라 사랑방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랑방 쪽으로 돌담이 터져 있었다.

1970년대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농가주택 지붕개량사업을 할 때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고, 내가 서울로 유학을 간 1974년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등유를 쓰는 호롱불과 ‘호야’라고 부르던 것이 조명이었다. 촛불은 제사 때만 썼다. 국책사업인 농어촌전화(電化)사업 덕에 1975년에는 고향집에도 전기가 들어왔고 텔레비전이 생겼다. 할머니는 등유를 아껴야 한다고 저녁만 먹으면 바로 자라고 하여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2004년 예천양수발전소가 들어올 때 보상을 받으면서 확인하니, 우리 집의 대지는 여전히 진외가(할머니 친정)의 소유였고 집은 미등기 상태로 있었다. 다행히 가옥대장에는 아버지가 가옥의 소유자로 등재되어 있어, 집값은 우리가 받을 수 있었지만, 대지에 대한 보상금은 등기명의자인 진외가에서 수령하였다. 나는 진외가 소유의 땅, 남의 땅을 빌려서 지은 미등기 초가집에서 태어나 자란 셈이다.
 

이렇게 나의 출생지와 성장지는 예천이지만, 나의 등록기준지(본적)는 지금까지 항상 경북 영주시 풍기읍 백리 513번지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연유가 있다.

나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창원황씨 대상공파(大相公派) 27세다. 우리 가문은 조선 중종 때인 1527년에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안동권씨, 문화류씨 다음으로 세 번째로 일찍 족보를 만든 가문이다. 우리나라 황씨의 원조는 중국 후한 때 한학사 황락(黃洛)이다. 그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에 귀화하여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기성군(기성은 현재의 평해), 장수군, 창원백에 봉해져 각각 본관은 평해, 장수, 창원 황씨로 하였다.

창원황씨 대상공파는 고려 때 의창현(1408년 의창현은 회원현과 합쳐져 창원부가 되었다)의 정조호장을 지낸 황양충(이하 존칭을 생략)을 1세 시조로 한다. 그 위 선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2세 황양돈도 정조호장을 지냈고, 3세 황석주는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하여 대상(大相)을 지냈는데 3세 황석주를 중시조로 한 종파가 바로 내가 속한 창원황씨 대상공파이다. 3세 황석주의 선대 황양돈을 기준으로 호장공파(戶長公派)라고도 한다. 1518년 중종 때 경상도 도사(都事)로 부임한 13세 용헌공 황사우(黃士佑)가 쓴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1)에 따르면, 경상감사를 수행하여 창원부를 순력(巡歷)할 때 창원의 일가 집을 다 뒤진 끝에 나중에 족보의 근거가 된 가승(家乘)을 찾았고, 거기에 1세 황양충 이후부터의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4세 황영렬은 응양군 상호군, 5세 황유는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동래부사와 전객령을 지냈다. 6세 황진백은 침원서 영을 지냈다. 창원황씨 대상공파는 일찍부터 창원의 토착호족으로서 가문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다.
 

고려 말 1357년에 7세 황승후(黃承厚)가 솔가하여 창원에서 순흥부 병산(현재의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신호위 정용중랑장을 지냈다.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있는 순흥도호부는 순흥안씨 안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강 이남은 순흥이요, 이북은 송도’(南順北宋)’라고 할 정도로 큰 고장이었다. 금성대군의 제2차 단종복위운동으로 해체될 때까지 그랬다. 순흥은 고려 때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胎)를 잇따라 묻으며 순흥부가 되었다. 그래서 순흥에 태장(胎藏, 胎庄)이란 마을이 생겼다. 용헌공 등 나의 조상들 산소가 지금도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산록에 있다. 1413년에는 순흥도호부가 됐다. 99칸 짜리 기와집이 즐비했다고 한다.

8세 황처중은 영일감무(監務)를 지냈다. 8세 황처중의 장남인 9세 황제는 도량서 승을 지냈고, 차남인 9세 봉례공(奉禮公) 황전(1391-1459)은 통례원(조회와 의식을 담당하는 관청) 봉례(奉禮)를 지내는 등 순흥으로 이주한 후에도 가문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봉례공은 증손자 용헌공 13세 황사우가 높은 벼슬에 이르자 나중에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놀랍게도, 9세 봉례공 황전이 1426년(세종 8)에 낙향하여 심은 갈참나무가 현재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에 아직 살아 있다. 천연기념물 제285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인 것은 전국에서 단 한 그루밖에 없다. 참 귀한 나무다. 흉년 때 도토리죽으로 연명하기 위해 심은 것이니, 봉례공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수령 6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생육 상태가 양호하고, 현재도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는 금줄이 쳐져 있다. 낙향한 봉례공은 1429년(세종 11) 첨모당(경상북도 문화재 제315호)을 지어 유생을 가르치면서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1)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감영(監營)에 관한 일기다.

황전이 심은 갈참나무

갈참나무의 잎

첨모당

나는 9세 봉례공의 18대 직계 혈손이고, 그래서 창원황씨 대상공파 ‘봉례공 대종파’에 속한다. 1456년(세조 2) 순흥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금성대군(1426∼1457,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세조의 동생)이 사람을 보내 쌀 포대 속에 은괴를 건네면서 봉례공에게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봉례공은 병이 들어 갈 수 없다고 사양하고, “일찍이 서로 교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위도 다르니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당시 역사를 보자.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에서 하사품을 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자[계유정란],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을 반대하고 단종을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금성대군은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黨與)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1456년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때 금성대군도 삭녕에서 다시 순흥으로 이배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에 위리안치된 뒤, 순흥부사 이보흠2)과 모의해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처형당하였다. 금성대군에 동조하던 순흥도호부 지역 수백 명의 선비들과 가족도 죽었다.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임을 당했다. 순흥도호부의 인구 2천여 명 중 순흥안씨만 무려 700여명이 죽었다.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여리를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나의 할머니(안모열)가 순흥안씨다. 정축지변(丁丑之變)에서 순흥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9세 봉례공과 가족은 무사하였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봉례공이 그 때 금성대군이나 순흥부사 쪽에 가담하였다면 나는 태어날 수 있었을까? 순흥 일대의 선비들이 모두 명분 있는 거사에 가담하였다가 몰살하였는데, 봉례공이 가담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두고 ‘겁쟁이 황서방’이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광정이 쓴 ‘봉례황공전변묘봉안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금방 화가 일어나 죽계가 피로 물들었네. 눈앞에서 가혹한 형벌 행해졌으나 공만은 초연하였네. 우리 황씨 면면하니, 아! 공으로 인하여 온전할 수 있었네.”
9세 봉례공은 우리 집안이 영주의 기축(基軸) 가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토대를 연 인물로 평가된다. 사당 숭보사(崇報祠)에 모셔져 있다.
순흥은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 터에 그의 뜻을 기려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소수서원 맞은 편 죽계천 바위에 퇴계 이황이 쓴 흰색의 ‘백운동(白雲洞)’ 글자 아래에 붉은 색의 ‘경(敬)’ 자가 남아 있다. 정축지변 후에 밤마다 원혼의 울음소리가 들려 주세붕이 넋을 달래주기 위해 새겼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백운동서원에 대해 조정에 사액을 건의하자 1550년 명종은 친필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을 써서 사액하고 사서오경 등 책과 토지, 노비를 파격적으로 지원하였다. 소수서원은 왕명을 받아 대제학 신광한3) (1484-1555, 신숙주의 손자이다)이 이름을 지었다.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즉,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이다.  


2)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그 후손이다.
3) 기재 신광한은 1536년 용헌공 황사우의 묘갈명을 찬하였다.

소수서원은 1888년까지 350년 간 무려 4,200여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봉례공의 아들 10세 황귀경(1413-1490)은 종사랑을 지냈다. 10세 황귀경은 손자 황사우로 인하여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0세 황귀경은 평생 남의 장단점을 비평하지 않았고 성품이 어질어서 살아 있는 미물도 발로 밟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거나 남의 물건을 탐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은둔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봉례공의 손자 11세 황희성(1455-1524)은 순릉참봉을 지냈다. 황희성은 풍기군 희여골[백동·白洞]에 살던 고모부 노계조의 시양자가 되어 1492년 희여골로 이주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바로 그 해에 풍기 희여골로 이주한 것이다. 아들인 12세 용헌공 황사우(1486-1536)가 7살 때이다. 11세 황희성의 장인은 풍기의 토족 풍기진씨 예문관 제학 진유경이다. 11세 황희성은 장남 용헌공 황사우, 풍저창 직장 황사호, 현감 황사걸을 낳았다. 11세 황희성은 아들 황사우로 인하여 숭정대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그는 천성이 어질고 순근하여 남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독서를 즐기고 검소하였다. 노인을 보게 되면 반드시 재배하였고, 향교를 지날 때는 걸음걸이를 빨리 하였으며, 사람들이 벼슬을 권하면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고 한다. 희여골로 이주한 후 4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하고 서울에서 벼슬을 하는 등으로 희여골 황가 집안은 크게 번성했다.

12세 용헌공 황사우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외삼촌 진담이 서울로 데려고 갔다. 서울에서 공부하여 15세에 진사시 초시에 입격하고 1507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514년 별시문과에서 박세희와 공동장원을 하였다. 임금도 우열을 가릴 수 없어 공동장원으로 했다고 한다. 1516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조천록>을 기록하였는데 아쉽게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1518년에는 고향 풍기 백동에 사는 노부모를 가까이에서 모시려고 자원하여 경상도 도사(아감사)로 부임하였는데, 2년 동안 경상도 도사로서 감사를 수행하여 경상도 일원을 순력(巡歷)하면서 기록한 일기가 유명한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경상북도가 4천만원, 우리 형제가 1천만원을 지원하여 경북대학교에서 탈초 번역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감영(監營)에 관한 기록이자, 조선의 관료가 남긴 가장 오래 된 일기다. 2013년에 서울대 규장각에서 나온 단행본 <일기로 본 조선 … 일상의 기록에서 역사를 만나다>에도 소개되어 있다. <재영남일기>에 보면 1519년 12월 기묘사화4)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진주에서 듣고 <聞士禍有感>이라는 시를 지어 사림의 피해를 애석해 하였다. 

妻斐從來作具錦(처비종래작구금) 예부터 저 소인배들이 교묘히 큰 죄 얽었으나
靑天白日本淸明(청천백일본청명) 청천백일은 본래 청명(淸明)하도다.
彼蒼未欲唐虞治(피창미욕당우치) 저 하늘이 요순 정치 원치 않은가?
陳榻龍門是禍抗(진탑용문시화항) 훌륭한 선비들 화로 매장 되었도다.


4)1506년 중종반정은 훈구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므로 중종 초기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사림파의 본격적인 진출은 1515년(중종 10) 이후에 가능했다. 조광조(1482-1519)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대의 사림파는 강력하게 삼대(夏·殷·周)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도학정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와 같은 언관 직에 진출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천거제를 통하여 과거제나 문음으로써 등용할 수 없는 유일(遺逸)과 학생)을 선발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또한 여악(女樂)·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기신재(忌晨齋)·소격서(昭格署)를 혁파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책봉된 정국공신에 대한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제거 당했다.

그 후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 시강원 문학, 시강원 필선·보덕, 사간, 집의, 영천(현 영주)군수(1522), 대사간(1529), 승지, 도승지,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경기도 관찰사(1533), 호조판서(1534), 병조판서(1535), 예조판서, 이조판서,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다. 우리 조상 중에서 가장 벼슬이 높이 올라간 할아버지가 12세 용헌공이다. 희여골에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에 모셔져 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나에게는 늘 존경해 마지않는 대단한 조상이다. 영주군수도 지냈다.
용헌공의 인척이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1481-1537)이다. 용헌공은 김안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로 더불어 벼슬이 높아졌다. 김안로는 1501년에 진사가 되었고, 1506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에 처음 임명된 뒤 수찬·정언·부교리 등 청환직(淸宦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내리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직제학·부제학·대사간 등을 거쳤으며 일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재영남일기>를 보면 용헌공이 경상도 도사 시절 김안로는 경주부윤이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몰락한 뒤 발탁되어 이조판서에 올랐다. 아들 희가 효혜공주와 혼인해 중종의 부마가 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심정, 대사간 이항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에 유배되었다. 남곤이 죽자 1530년 유배 중이면서도 대사헌 김근사와 대사간 권예를 움직여 심정의 탄핵에 성공하고, 이듬 해 유배에서 풀려나 도총관·예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1531년 다시 임용된 이후부터 동궁(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해 허항·채무택·황사우 등과 함께 정적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켰다. 정광필·이언적·나세찬·이행·최명창·박소 등 많은 인물들이 이들에 의해 유배 또는 사사되었으며, 경빈 박씨와 복성군 등 종친도 죽음을 당했다. 또한 왕실의 외척인 윤원로·윤원형도 실각 당하였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인과 대사헌 양연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진다. 용헌공은 그 전 해에 이미 돌아가셔서 3흉에서는 빠졌고 불문에 붙여졌다.
중종실록 1536년 3월 12일에 이렇게 적혀 있다. 패자이기에 그렇게 적힌 것이 아닐까?

“이조판서 황사우가 경상도 풍기에서 죽었다. 【풍기는 그의 고향이다. 조상의 산소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휴가를 받아 내려갔다가 이내 죽었다.】【사신은 논한다. 황사우는 겉은 소박한 듯하나 속은 음흉스러웠다. 김안로의 친척으로 빠른 시일에 높은 품계에 올라 날마다 김안로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고 그의 간사한 계략을 많이 도왔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양곡 소세양5)의 만사(輓詞)는 이렇다.

5)당대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 바로 그 소세양이다.

봉별소양곡(奉別蘇陽谷) - 윗사람 양곡 소세양과 이별함.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달빛 밝은 뜰 안에 오동닢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릿발 짙은 들녁에 국화 꽃 누렇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다락 높아 한자면 하늘과 닿을 듯하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사람은 취하여 천 잔 술을 마시었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냉) 흐르는 물에 젖어 거문고 소리 싸늘해지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꽃 피리 소리에 묻혀 향기롭네.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후에,
士林共抱云亡嘆(사림공포운망탄) 사림은 공히 그의 죽음을 탄식하고,
聖主方懷不整傷(성주방회부정상) 성주(聖主)께서는 수습하지 못한 슬픔 품으셨네.,
銓省嚴廊俱寂寬(전성엄랑구적관) 이조 병조 의정부는 모두 쓸쓸해졌으나,
只應靑史姓名芳(지응청사성명방) 응당 역사에 그 꽃다운 이름 남으리라.

규암 송인수6)의 만사(挽詞)는 다음과 같다.

溫溫辭氣足聆瞻(온온사기족령첨) 온화한 말씀은 우러를 만하였고
位近鈞鮮德日謙(위근균선덕일겸) 벼슬은 정승에 가까워도 날로 겸손하였네.
早歲己諧態虎卜(조세기해태호복) 젊은 나이에 이미 큰 인물 되리라는 점괘 맞았으나
中年遽値巳辰占(중년거치사진점) 중년에 갑자기 진사(辰巳)의 액(현인의 죽음)을 당했네.

12세 용헌공의 장남이 13세 선무랑 황윤규(黃潤奎, 1515-1587)로서, 나는 그 후손이다. 용헌공의 차남 13세 송간공 황응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고, 송간공의 장남 14세 정익공 식암 황섬과 차남 부훤당 황시도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익공은 임진왜란 호종공신이다. 13세 송간공의 사위가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이다. 용헌공의 삼남 황서규의 장인은 고성군인데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대 그리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가 소세양을 그리워 하면서 지은 시조도 유명하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은 모로더냐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소세양이 한양으로 떠난 후 황진이가 노비 편에 ‘夜思何’를 지어 보내니 그 내용은 가수 이선희의 ‘내 마음 아시나요’로 번안될 만큼 유명한 시다.

蕭廖月夜思何事(소료월야사하사) : 소슬한 달밤이면 그대 무슨 생각하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밤이 꿈인지 생시인지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록망언) : 임이시여 때론 제가 드린 말 잊지 않고 기록해 두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 이승에서 맺은 인연 정녕 믿어도 될까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 오래오래 임 생각하면 한이 없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 날마다 제 생각 얼마나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 바쁠 때에도 제 생각하시면 괴로운가요 아니면 기쁜가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 참새처럼 떠들어대도 여전히 정겨우신가요?

6)규암 송인수는 김안로와 항상 반대편에 섰던 정적이었음에도 김안로의 당여 황사우에 대해 좋게 평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송인수는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때 김안로가 권력을 휘두르자, 홍문관의 모든 관원이 함께 공정한 인사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특히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는 칭병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성균관대사성을 겸임하였다. 1536년에 황사우에 대한 만사를 쓸 때 송인수는 유배 중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다가 사사되었다.

그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조선 초기 외손봉사의 풍속을 반영한 것이다. 황사호의 아들(용헌공의 조카) 13세 황여규는 봉화훈도를 지냈다. 정익공의 아들 15세 조대공 황유중도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 정권이 열리자 낙향하였다. 그 후에도 후손들은 처사와 학자로서 향교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풍기 희여골에서 문과급제 9장, 사마급제 34장이 났다.
용헌공의 장남 13세 선무랑 황윤규의 아들이 14세 별제공(別提公) 황현(1576-1652)이다. 한산 이상정이 지은 “별제황현묘갈명(別提黃晛墓碣銘)”이 남아 있다.

공의 이름은 현(晛)이요, 자(字)는 백휘(伯輝)이며, 관향은 창원이다. 고려조에 대상을 지낸 황석주가 시조이다. 증조는 황희성이며 참봉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는 황사우이며 우찬성 겸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황윤규이며 선무랑이다. 첫째 부인은 문화류씨이고 두 번째 부인은 완산이씨이며 충의위 이형식의 따님이고 임영대군의 5세손이다. 만력 병자년( 1576년) 8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굳세며 재기와 덕량과 예의와 법도가 있었고 숙성하여 나이 18세에 음직으로 사섬시의 참봉에 보직되었으나 학업이 미숙하다고 사임하였고, 임인년(1602년)에 제천 훈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을사년(1605년)에 봉사에서부터 직장, 빙고 별검으로 옮겼다가 별제로 승진되었다.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집에서 많이 사사로이 얼음을 구하였으나 공이 일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은 나라에서 소용되는 것인데, 어찌 마땅히 관리가 사사로이 인정에 쫓아서 응하겠는가!”라고 하니 헐뜯음이 사방에서 이르렀으나 역시 돌아보지 않았다. 병오년( 1606년)에 이런 일로 해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사람들이 더러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스스로 즐겼다. 공은 효도로써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우선하였고 가족 간의 처신에 있어서는 믿음을 돈독히 하였다. 재화는 멀리하고 조세는 적절하게 받고 방자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그냥 수용할 뿐이고 앙갚음하지 않았다. 임진년(1652년) 8월 1일에 타계하니 나이는 79년을 누렸다. 그해 10월 4일에 순흥 거먹골[묵동, 墨洞] 북쪽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대의 묏자리를 따른 것이다. 부인은 남양홍씨이며 부사 홍여성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파평윤씨이고 현감 윤대련의 따님이며 공보다 5년 앞서 타계했는데 공과 더불어 같은 언덕에 있으며 봉분은 다르다. 1남 4녀를 낳으니 아들은 황유찬이고, 따님은 군수 이진철과 선비 박이문, 박안시, 조명언에게 각각 출가했다. 황유찬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황한익과 황진익, 황해익이고 황해익은 호군이다. 두 딸은 권도와 정종도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이진철의 4남은 이천기, 이봉기, 이운기, 이태기이고, 3녀는 이상뢰, 조장, 현감 노사맹에게 출가했다. 사위 박이문의 4남은 박경, 박항, 박휘, 박보이고, 3녀는 김상헌, 금덕휘, 권정에게 출가했다. 사위 박안시의 3남은 박시춘과 진사 박시하, 박시추이고, 4녀는 권와, 문과급제 금신휘, 정호, 전신중에게 출가했다. 사위 조명언의 1남은 조욱이며, 1녀는 김숙망에게 출가했다. 증손자 황도동, 황도종, 황도융은 황한익에게서 태어났고, 황도일은 황진익에게서 태어났으며, 황도삼·황도대는 황해익에게서 태어났다. 현손 이하는 많아서 전부 기재할 수가 없다. 공이 돌아가신 지 115년 후에 몇 세손 황응륜이 서신을 이상정에게 부쳐왔는데 거기에 ‘집안에 많은 사고가 있어 묘소로 가는 길에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했었는데 이제 돌을 갖추어 새길 글을 부탁한다.’고 함에, 이상정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서문을 쓰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세상 사람들 정에 따라 아부하여도
나는 확고히 지조를 지켰고,
집을 위해 분주히 달려서 영화를 구했지만
나의 뜻은 높았다.
한 골짜기 한 언덕에서 한평생 스스로 즐겼다.
거먹골 언덕 멀리에 묘소 있는데
시(詩)를 돌에 적으니 세상 무궁토록 전해지리라.

한산(韓山) 이상정(李象靖)은 짓는다.

14세 별제공의 아들 15세 황유찬(黃有纘)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16세 통덕랑 황한익(黃漢翊: 1615-1691), 황진익(黃振翊), 황해익(黃海翊)이다. 16세 통덕랑 황한익의 묘갈은 현손인 황최원이 찬하고 황용한이 썼다. 16세 황한익은 3형제를 두었는데 17세 황도동(黃道東), 황도종(黃道宗), 황도융(黃道隆)이다. 장남 황도동은 후손이 없어 황도종의 아들 18세 황상이 양자로 갔다. 18세 황상은 19세 응경, 응륜(1699-1780), 응서(應緖), 응위, 응유 다섯 아들을 두었다. 19세 응경, 응륜은 후손이 끊어졌다. 19세 황응서는 무신란(戊申亂)에 대항하여 의병진이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여 사병(司兵)을 맡았다. 그 아들이 20세 익원, 기원, 지원인데, 장남 익원은 후손이 없는 19세 응경에 출계하였다. 20세 황기원(黃起源)의 아들이 21세 황잉한인데 후손이 없이 30대에 돌아가시어 백형의 조카 22세 황중수(黃中琇)를 입양하여 후손을 겨우 이었다. 22세 황중수 할아버지가 나의 5대조다. 22세 황중수는 양모를 극진히 모시고 학문에 정진하고 상당한 가업을 잘 지켰다고 한다. 현재 22세 황중수 이하 조상들이 모두 안동시 풍산읍 노리 가족묘원(납골묘)에 모셔져 있다. 22세 황중수는 23세 황종하·황용하를 두었는데, 장남 황종하는 백부의 양자로 갔다. 23세 황용하가 나의 고조부다. 고조부 두 형제는 우의가 두터워 문중 향리에서 우애고택(友愛故宅)이라 불렀다고 한다. 재산도 공동관리[共財用]하였다고 한다. 23세 황용하의 아들이 24세 황재상이니 나의 증조부다. 그런데 고조부 형제(종하, 용하)가 돌아가시고 나서 큰 집 종백형 황재호가 재산을 독차지 하고 증조부는 분재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작은 집인 증조부는 가난해졌다. 증조부는 가난했지만 3형제를 두고 48세(1922년)에 돌아가셨다. 큰 집 황재호에게는 자식이 없어 나의 큰 종조부 25세 황의흠을 양자로 원하였으나 우리 집 재산을 다 차지한 앙금 때문에 거절하였다고 한다.
25세 3형제는 종조부 황의흠, 나의 조부 황기흠, 종조부 황성흠이다. 할아버지 3형제는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25세 종조부 황의흠은 무안박씨 종조모와 사이에 딸(나의 종고모 홍공순)만 두고 증조부가 돌아가신 지 3년 후에 일찍 작고하였다. 종조모(큰 할머니)는 영주시 부석면 우수골 무안박씨 종가 출신이라 모르는 게 없었다. 큰 할머니는 겨우 27살 때 큰 할아버지가 작고하자 시어머니(나의 증조모)를 모시고 시동생들(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와 살았다. 큰 할머니는 양자로 삼을 큰 아버지(황순우)가 일찍 작고하자 딸(나의 종고모)과 함께 인천 운연동에서 살다가 내가 사법연수원 다니던 1984년 돌아가셨는데, 내가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자주 찾아가면 친손자처럼 대해주었다. 장례 때는 장손자 격인 내가 상주 노릇을 하였다. 할아버지(황기흠)는 두 형제를 두었다. 26세 백부 황순우(후손 없이 작고)와 아버지(황순헌)이다. 백부(황순우)는 큰 종조부(황의흠)에게 출계할 예정이었으나 23살에 요절하였다. 그 후 27세 황정근·황창근·황호근, 제28세 황사현·황사윤·황사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7대 종손이다.
풍기군은 일제 때인 1914년에 영주군으로 통합되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태어난 예천군 하리면은 1895년에는 풍기군 하리면이었고, 1914년에는 영주군 하리면이었다가 1923년에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원래 풍기 백동(희여골)에 대대로 살던 할아버지는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 순흥안씨 종가 출신인 할머니(안모열)와 결혼했는데, 할머니가 시댁이 워낙 가난하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정을 오가다가 진외조부(할머니의 아버지)가 1927년 예천읍 노하리로 이사 가면서 내준 친정집에 딸(1926년 생. 큰고모)을 데리고 가서 살았고, 할아버지는 하리 집과 풍기 집을 왔다 갔다 했다. 할머니는 태어난 그 친정집에서 돌아가신 셈이다. 당시 풍기 집에는 할아버지의 노모(나의 증조모)와 형수(나의 종조모, 종조부 황의흠은 딸 황공순만 두고 일찍 작고)와 그 딸(황공순, 나의 종고모), 할아버지의 동생 황성흠(나의 종조부)이 살고 있었다. 1929년에 백부(황순우)가, 1932년 아버지(황순헌)가 태어난 후 1935년 3월에 결국 할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로 완전히 이주하였다. 그 후부터 월감에서 길쌈을 하고 농토를 사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원래 3형제 중 둘째였는데, 큰 할아버지는 딸만 한 분 두고 일찍 돌아가셔서 실질적인 장손이 되었다. 작은 할아버지(황성흠) 가족도 할아버지를 따라 월감으로 이주하였다. 한 마을에 살면서 할아버지 형제는 매일 새벽에 먼저 일어난 분이 찾아가 집안 대소사를 논의할 정도로 형제간 우애가 좋았다. 1947년 대구경북 10·1폭동 때 폭동에 가담했던 할아버지의 친구 김도희·김숙희 형제가 우리 집으로 숨어들어오자 할아버지가 집에서 재워주고 한복을 입혀서 보내준 일로 지서에 끌려가 치안대와 서북청년단에게 밤새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실신하였을 때, 박대봉씨의 도움으로 풀려난 할아버지를 울부짖으며 들쳐 업고 귀가한 분이 작은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보름 만에야 겨우 회복이 될 정도로 심하게 맞았는데, 1969년에 돌아가실 때 당시에 고문을 당하며 맞은 매 자국이 온 몸에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월감에서 모두 2남 3녀를 낳았다. 백부(황순우)와 아버지(황순헌)는 하리면의 은풍초등학교를 다녔다. 큰 아버지는 공부를 잘 했으나 대전사범학교 입시에 연달아 낙방하였다. 백부는 서울의 진외가(권영철) 공장에서 취직을 해서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야간 중학교 속성과를 나왔다고 한다. 꿈이 상주군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해방 후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해방 후 백부를 귀향시키고, 혼자 사는 ‘석평 어른’이라는 황씨 집안 선비(황맹선)를 집에 독선생으로 모셔서 일본말을 배운 백부와 아버지에게 2년 동안 한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백부는 ‘소학(小學)’부터, 아버지는 ‘동몽선습(童蒙先習)’부터 배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가난하였으나 교육열은 대단했다. 인근에서 소문을 듣고 학동(學童)이 모여들어 우리 집은 50여명의 학당이 되었다고 한다.
백부는 1948년 영주시 평은면 금계 출신 김제인(1930년생)과 혼인했다. 백모의 오빠 김제선은 독립운동가이고, 외삼촌(이신호)이 예천군수를 지냈다. 백모는 만주에서 중학교를 나와 해방 후 귀국하여 결혼 후 바로 백부의 병마(위암) 뒷바라지만 하고만 셈이다. 백부는 위암을 치료하지 못하고 1951년 23살에 후손도 없이 돌아가셨다. 그 장조카인 내가 양자로 갔어야 하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고향집에서 30여리 떨어진 예천읍내의 대창중학교를 들어갔다. 입시가 끝났는데 백모의 외삼촌인 이신호 예천군수가 대창중학교 김석희 교장에게 부탁하여 보결로 입학하였다고 한다. 1학년 때 80명 중 8등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명문인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제5공화국 때 유명한 권정달 전 민정당 사무총장이 안동고 2회 동기다. 고향에서 안동까지는 100리 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만 한 게 아니라 양잠도 하였고, 할머니는 길쌈을 했다. 당시 삼베와 명주는 짜기가 힘들었지만 돈이 되었다. 그 돈으로 농토를 마련하여 6·25전쟁 무렵에는 논 4천여평, 밭 3천여평의 중농이 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아버지는 인민군의 의용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영주시 봉현면 인민위원장을 하던 집안의 아재뻘 되는 어른(황정흠)의 집에 가서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철수할 때 그는 월북하면서 학생이 뭘 알겠냐고 하며 아버지를 데리고 가지는 않았다. 그 어른은 아버지에게 봉현면 직인을 찍은 봉투를 주면서 예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인민군을 만나면 봉현면의 심부름을 간다고 둘러대라고 해서 아버지는 추석날 후퇴하는 인민군 대열을 뚫고 무사히 귀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합격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대학을 다니지는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약 4년 간 큰아버지 치료비를 대고, 아버지를 안동에서 공부시키느라 농토를 상당히 처분하여 다시 가난해져서 아버지는 대학을 갈 형편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호통을 치면서 대학에 꼭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입대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1955년부터 육군에서 3년여를 복무한 후 제대했는데, 그 사이에 결혼도 하여 제대할 때는 이미 누나(1958년생·황정모)가 태어나 있었다. 어머니는 예천군 용문면 대제리(큰맛질)의 함양박씨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이었다. 초등학교만 다녔다. 외조부는 일제 때 용문면사무소 서기를 했고, 외조모(권홍임)는 봉화 닭실마을 충재 권벌(1478∼1548)의 후손으로서 유명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춘번 권명섭(1885~1960)의 맏딸이다. 권명섭 선생은 1919년 유림이 주동이 된 ‘파리장서사건’의 주역으로, 일제 때 투옥되었던 애국지사이다. 어머니는 5남 1녀 외동딸이어서 귀하게 자랐으나 아버지와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삿일을 하며 3남 4녀를 낳아 기르느라 참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첫째 외삼촌은 6·25전쟁 때 기관사를 하다가 북한에 남게 되었고, 둘째 외삼촌은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생사불명이다. 어머니 아래로 외삼촌 3형제가 있다.
아버지는 제대 후 서울과 대구에서 여러 직장을 임시로 다니다가 정식 직원이 못되자 귀향하여 예천농협 직원이 되었다. 당시 조합장이 최원한씨인데, 내가 1974년 예천중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할 때 교장선생님으로서 나의 전학을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1961년 5·16군사혁명 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요원(하리면 간사)이 되었다가 민정 이양 후 특채로 예천군청 공무원이 되었다.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면서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였다. 아버지는 부모를 모시고 집에서 농사를 거들어야 하였기에 군청에 요청을 하여 집에서 가까운 하리면사무소와 상리면사무소에서만 근무하였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교육열이 남달랐다. 당신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입대하였고 제대 후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하다가 고향의 말단 지방공무원이 되고 나서, 아버지는 자식들만은 절대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뒷바라지 하겠다고 명세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3남 4녀를 모두 서울로 보내 교육을 시켰다.
할아버지는 친구가 많아서 사랑방에는 거의 매일 하얀 옷에 갓을 쓴 어르신들이 와서 밤늦게까지 얘기하다가 함께 자고 갔다. ‘유전할배’가 가장 많이 왔다. 황성근 전 중앙일보 기자의 할아버지다. 황성근은 내 동부초등 제25회 동기인데, 그 아버지(황하량)는 내가 예천중학교를 다닐 때 교감선생님이었다. 그 당시는 친구가 방문하면 자고 가는 게 당연지사였다. 할아버지는 성격이 온후하고 인자하며 인정이 많아 풍기 백동 문중에서나 동네에서 평이 참 좋은 분이었다. 가난하였지만 봉제사에 충실하였고 문중을 출입하였으며 의관을 항상 단정히 하였다. 나중에 돌아가셨을 때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이 수십 개였고 뒷산(절골) 장지 주변의 온 산은 문상객으로 허옇게 뒤덮였다. 5일장을 하고 산에서 문상객을 맞는데 국밥을 하느라 쌀이 몇 가마니가 들었다고 한다. 며느리인 어머니는 나에게 ‘너희 할아버지 같은 분은 없다’고 늘 말씀하였다. 할아버지는, 외사촌(권영철, 그 아들이 내 대성고 동창 권오성이다)이 서울 아현동에서 살며 사업을 하였기에, 시골에 살면서도 외사촌 집에 1년에 몇 차례씩 왕래하면서 서울이라는 대처를 경험하여 동경하였다. 그래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할아버지가 정한 가훈은 ‘효우목린(孝友睦隣)’이다.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은 할아버지의 그것을 본받은 것이다. 늘 흰 한복 차림의 할아버지는 장녀인 누나와 장남인 나를 무척 귀여워하였고, 무등을 태우고 발 위에 태워 같이 놀아주었다. 사랑방에 친구가 오면 항상 손자인 나를 불러 큰절을 하게 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따라 읽도록 하였고, 내가 잘 모르면서도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하며 무조건 따라 외우자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나는 사실 한글은 공부하지 않아서 국민학교 들어갈 때 내 이름 석 자만 겨우 썼다. 할아버지는 내가 공부도 잘하고 하니 서울에서 반드시 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자 서울에 집을 얻어서 할머니와 누나와 나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가려고 계획을 하였다. 나에게 커서 판사가 되라고 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는 1968년 장날 불의의 낙상 사고를 당해 서울대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고 석 달 만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시면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 직전에 아버지에게 자식들을 반드시 서울로 보내 교육을 시키고 고향 풍기로 돌아가라고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유언을 따라 우리 3남 4녀를 모두 서울로 보내 교육을 시켰고, 예천양수발전소가 들어와 월감 동네가 수용되어 실향민이 된 후 2004년 12월부터 1년 간 풍기읍 동부리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나니, 내가 서울로 진학할 길이 막혔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는 은풍초등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읍내의 예천동부초등으로 전학을 가서 한 학기를 다닌 후 제25회로 졸업한 후 은행 알 추첨으로 내가 원하던 예천중학교에 진학하였다. 2학년이던 1974년 다시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서울 연희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74년 6월 14일, 영주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하였을 때가 내가 서울에 첫 발걸음을 디딘 날이다.
아버지는 내가 예천중학교 들어가서부터 바로 서울로 위장전입을 하여 전학을 추진하여 서울에서는 연희중학교에 배정이 되었으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예천군교육청에서 실시한 제1회 학력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으로 우수한 자원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전학 서류에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때 아버지가 예천농협 다닐 때 조합장이던 최원한 교장선생님을 알아보고 설득하여 겨우 전학을 하였다. 연희중을 졸업하고 추첨을 거쳐 대성고등학교를 3년 다니고(제4회) 종로학원에서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동기생은 160명이다. 아버지로서는 할아버지 때부터의 꿈을 결국 이룬 것이다. 합격자 발표는 직접 게시판에 방을 붙여서 하였는데, 아버지는 동네 석기진씨와 함께 서울대학교 교정에 직접 와서 합격을 확인하고는 우셨다. 예천군 태생으로 서울법대에 합격한 것은 1973년에 입학한 권기수 변호사(전 검사) 이후 7년 만이었다.
시골에서 뙤약볕 아래서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님과 여상을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는 누나가 준 학비와 용돈으로 대학을 다니는 나로서는 데모라든가 학생운동과 같은 공부 이외의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정말 인간적인 도리가 아니었다. 정의의 문제도 중요하였지만 나는 생존의 문제, 다시 말하면 촌놈이 서울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를 따라 ‘현대경제연구회’에서 가입하여 소위 의식화 학습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관심을 전혀 끊기는 어려워 몇 번의 데모 대열에 참가하였고 1980년 5월 서울역 회군 때 서울역 광장에도 있었다. 1980년 휴교 후에는 당시 서울공대를 다니던 대성고 친구 이상묵(현 삼성화재 기획실장, 부사장)을 따라 서울대와 이화여대의 연합 문학 써클인 ‘호라이즌문학회’에 들어가 조잡하나마 시를 쓰고 독서 토론을 하는 것으로 대학의 저학년 시절을 보냈다. 허름한 망원동 회관과 포장마차를 드나들며 그렇게 보냈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편집부장이 되어 매주 정기모임의 주보와 학기말 문학지를 발간하였는데, 내가 등사기의 잉크 롤러를 직접 밀어 프린트를 하였고, 후배들은 필경과 제본을 했다. 등사기 조작은 편집부장의 일이어서 나는 등사기에 잘 숙달되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롤러를 밀고 종이를 빼냈다.
그러나 2학년 2학기부터는 사법시험 준비에 전념하기로 하고 문학써클 생활도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중앙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살다시피 하였다. 그 때부터 임수식(전 부장판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 오승원(전 판사, 법무법인 소망 대표변호사)과 셋이서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2년을 함께 공부하였다. 이 둘은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모범생들이어서, 나는 이 두 친구와 함께 공부하면서 그 덕을 많이 본 셈이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만 2년 동안을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수업시간, 점심시간, 저녁시간을 빼고는 중앙도서관에서 법서를 읽고 또 읽었다. 고시원이나 절로 공부하러 떠난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는 학교생활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시험 합격의 첩경이라고 철저히 믿었다. 이런 나의 전략은 결국 성공하게 된다.
대학 2학년 2학기부터 만 2년 동안 사시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부득이한 일이 없는 한 정규수업을 절대로 빠지지 않았다.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수업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나 교과서를 들고 강의실로 가서 1-2시간 정도 강의를 듣고 오면 기분 전환이 되고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다. 서울법대 교수진은 예나 지금이나 법학계의 쟁쟁한 권위자들이 아닌가. 그런 사계의 권위자들이 직접 수업시간에 강의하는 내용은 내 머리에 쏙쏙 들어왔고 그 후에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험 과목이 아니지만 황적인 교수님의 ‘경제법’ 과목도 수강하였다. 나는 그 강의에도 거의 빠지지 않았다. 한 학기 중 딱 2번을 결석하였는데, 평소에 출석을 부르지 않던 황 교수님이 하필 내가 결석한 그 날에 딱 2번 출석을 부르는 바람에, 나는 그만 100% 결석한 학생이 되고 말았다. 억울하여 교수님에게 물어보니 “항상 출석하던 너마저 결석하니 강의실에 몇 명 없어 출석을 불렀지.”하는 것이다. 참 억울한 일이다.
3학년이던 1982년 사법시험 1차(객관식)를 합격하고 4학년이던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83년 7월 동국대학교에서 2차(논술식) 시험을 치는 4일 동안 아버지는 매일 아침 함께 택시를 타고 시험장에 가서 시험이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밖에서 기다렸다.